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의 주인공 마코토는 진로 결정을 미루고 있는 고3 여학생이다. 우연히 바닥을 데구르 구르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된 마코토는 노래방의 예약 시간을 늘이거나 학교에 지각하는 순간을 모면하는 것으로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을 유예한다.

시간여행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미술품 큐레이터인 마코토의 이모는 마코토에게 세상이 멸망할 것만 같았던 전란의 시기에 그려진 역설적인 평화로움이 담긴 불화(佛畵)를 설명한다. 마코토는 해질녁의 강둑에서 미래에서 온 남자친구를 다시 미래로 떠나보낸다.

이 때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노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래에서 기다릴게라고 말하는 남자친구에게 ‘금방 갈게, 달려 갈게’라고 말하는 순간 마코토는 오래된 미래를 현재에 소환하고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것을 작정한다. 그 지점에서 우주의 비의가 모습을 드러내고 아직 아이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성장의 비밀을 말해준다. 그것은 실존적 행복을 획득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중력을 몸에 붙이고 살아가기를 작정하는 것이다.

Yasutaka Tsutsui

1967년 발표된 원작 성장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그 작정이란 다분히 민중적임에도 원작자는 당시 운동권에 냉소적이었다, 또한 한국 좌파들의 정치 프레임인 소녀상에 대해서도 온라인 공격을 감행했다. 소녀상은 순전히 역사적 죄악을 들추고 사과 및 보상을 받기 위한 목적 외에 한국의 좌파가 일본(과 친한 미국 및 한국의 우파)를 견제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2000년대 이후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현상학적으로 소비한 것은 일본과 한국의 좌파였다.

신자유주의와 성장위주의 경제 패러다임은 이제 유효하지 않은 시대다. 그러한 시대는 정치경제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다른 삶의 방식이란 몸과 마음의 다른 쓰임(用)과 구체화(體)를 요구한다. 일견 그 지점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구 철학사에서 최초의 현상학적 바닥의 탄생은 그것이 선(禪)의 공세와 요구라기 보다 공리주의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의 공리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수년간 정의(Justice)라는 테마로 논의 됐고 그것은 떼지어 몰려다니며 계산서를 내미는 중우주 집단 최면의 대표적인 사례인 촛불시위로 나타났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과 악의 도덕론은 비물질과 물질을 나누는 시도로서의 낮은 의식의 계를 소환한다.

정의론의 연원은 희랍철학에서부터 시작했고 희랍철학은 불교철학인 중론의 비이원론(Non-Dualism)과는 다른 이원론(Dualism)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서구철학적 전통에 의하면, 우리 존재의 존엄이란 기계로 대치 될 수 있는 것인가란 질문과 기계와 로봇에 반발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뒤따른다. 그래서 로봇에 지배되는 공포를 다룬 영화 「터미네이터」(1984)는 심신 이원론으로 부터 유래한다.

흔히 유심적 관점이거나 유심론과 유물론의 짬봉이라 오해되는 동양 철학적 관점에서는 이런 심신을 구분하는 시도란 인간의식의 한 증상 혹은 질환으로 여겨질 수 있다. 지난 시기 서구철학 관점의 유심론과 유물론의 동상이몽은 유사-아마추어 과학에서 자주 언급 되었다. 우리의 과학 방법이 그만큼 고도화 되지 않은데다 인간 마음의 양상을 다루는 심리학적 방법이 덜 발달된 경험주의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칼럼에선 이 아마추어 과학을 통한 과학 혁명의 방법을 논의할 것이다.

다시 도덕론으로 돌아와 우리는 친숙한 도덕, 이른바 한국인 마음의 저변에 흐르는 인본주의-유교적 ICT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일까 고민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동양 철학에선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을 낮은 의식 상태가 가진 특질로 본다. 애쉬튼 커쳐가 주연한 영화 「잡스」(2013)는 스티브 잡스가 아이와 여자친구를 매정하게 버리고 개발자(워즈니악)에게 개발 비용을 속인 비겁한 일들을 가감없이 보여 준다. 영화는 집요하고 강박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스티브 잡스를 클로즈업하며 끝난다. 전통적인 선-악의 구분은 스티브 잡스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진화생물학자인 린 마굴리스(1935~2011)는 공생성(Symbiogenesis)을 통한 세포내 공진화를 주장했다. 그의 급진적인 이론을 시스템 측면에서 살펴 보면 공생성이란 흔한 사랑과 신뢰의 Social Capital을 뛰어 넘어 작동한다. 침입자의 관점에서 계 내부에서의 표면적 사랑과 신뢰는 서로를 속이고 배신하는 이기적인 무한 경쟁의 술수로 진화를 거부하며 계를 낮은 차원으로 유지시키는 음험한 공모다.

이때 침입자와 내부 시스템의 최초 공모에 의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특이한 연합이 발생하며 공생성이 창발한다.

그런 연합은 도덕적 기준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이타적 의도에 의해 깊은 차원에서 작동한다. 표면적인 악의 연합은 선과 악의 정치적 균형이라는 번뇌를 바탕으로 한 먹고 먹히는 낮은 계의 경쟁적 시스템을 내폭시키며 시스템 자체를 허물어트리고 진화시킬 수 있다.

공생성과 그것의 마음 체계가 마련된 시스템은 보다 복잡한 용(用)과 체(體)를 통해 발전할 수 있다. 지난 칼럼들에서 밝힌 바와 같이 ICT 시대의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의 조합은 뇌과학적으로 무의식을 현실의식과 바로 만나게 한다는 점에서 개아적 깨달음과 유사하며, 다양한 장치를 통해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이 확장되고 변화한다는 대승적 관점을 구현한다. 인지과학에선 이미 마음이 나의 몸(뇌)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며 몸과 인공물의 환경에 걸쳐 있다는 관점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지과학적 해석은 화엄적 세계관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표하고 있다.

중요한 건 사상가들의 언어가 아닌 실천적인 일상에서의 경험이다. 보이지 않는 측면에서 그런 경험이란 댓가를 바라지 않는 나눔, 아무도 모르게 하는 착한 일, 착한 거짓말, 착한 의도를 감춘 나쁜 짓이다. 보이는 측면에서 그런 경험을 좀더 시스템화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적정기술을 통한 사회적 기업들이 그런 일을 한다. 사회적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진정한 사회적 기업이란 기술적 진보와 혁신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그런 기업들에서도 근간이 되는 것은 빅데이터로 드러나는 보이는 가치가 아니다. 착하지만 비밀스럽고도 심원하며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가치야 말로 ICT 시대의 에너지원이다.


이 글의 원본은 과학기술정보협의회 (http://www.astinet.kr/)에  ‘인지과학으로 만나는 IT-인문학 ‘이란 전문위원 칼럼으로 개제 되었습니다.

Juno
Author

한국표준협회 경쟁력향상센터 수석전문위원 nahojun@sod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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